미국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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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영화는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의 사진에서 기원하여, 토머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 제작으로 이어졌다. 초기에는 뉴욕을 중심으로 영화가 제작되었으며, 데이비드 W.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을 기점으로 발전했다. 무성 영화 시대를 거쳐 유성 영화 시대로 전환되었고, 할리우드가 세계 영화 산업의 중심지로 부상했지만, 경제 대공황으로 시련을 겪었다. 이후 다양한 장르 영화가 등장했으며,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대형 영화가 개발되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는 해외 자본과의 교류가 활발해졌고, 사실주의, 스릴러, 서부극, 사회 비판 영화, 뮤지컬, SF,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장르가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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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영화 | |
---|---|
영화 시장 정보 | |
이름 | 미국의 영화 |
![]() | |
스크린 | 40,393 (2017년) |
인구당 스크린 | 10만 명당 14명 (2017년) |
배급사 | 월트 디즈니 (38.5%) 워너 브라더스 (13.4%) 유니버셜 (12.7%) |
제작 연도 | 2016년 |
제작된 영화 | 646 (98.5%) |
제작된 애니메이션 | 10 (1.5%) |
관객 연도 | 2017년 |
총 관객 | 1,239,742,550명 |
2. 기원 및 역사
미국 영화의 기원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가 캘리포니아주 팰로앨토에서 촬영한, 달리는 말을 연속으로 찍은 사진(Sallie Gardner at a Gallop)에서 찾을 수 있다.[1] 이는 기록상 두 번째로 동작을 필름에 담아 재현한 사례였다. 마이브리지의 업적은 전국의 발명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토머스 에디슨은 키네토스코프를 발명하여 이러한 장치를 처음으로 제작한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1]
미국 필름 산업 초기에는 뉴욕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2] 퀸스의 카우프만 아스토리아 스튜디오는 무성 영화 시대에 세워져 마르크스 형제와 W.C.필즈가 사용했다.[2] 맨해튼의 첼시 또한 자주 촬영 장소로 이용되었으며, 메리 픽퍼드는 이곳에서 초기 영화를 촬영했다.[2] 시카고, 플로리다, 텍사스, 캘리포니아, 쿠바에서도 영화 제작이 이루어졌다.[2]
2. 1. 기원
미국 영화의 기원은 기록상 두 번째로 동작을 필름에 담아 재현한 에드워드 마이브리지가 캘리포니아주의 팰로앨토에서 한 줄로 정렬한 사진기로 찍은 달리는 말의 일련의 사진들(Sallie Gardner at a Gallop)을 꼽는다.[1] 마이브리지의 업적으로 전국의 발명가들이 동작을 담는 유사한 장치를 만들게 되었다.[1] 토머스 에디슨도 키네토스코프를 만들어, 그러한 장치를 처음으로 제작한 부류에 포함되었다.[1]미국 필름 산업의 초창기에는 뉴욕이 그 한 역할을 담당하였다.[2] 퀸스의 카우프만 아스토리아 스튜디오가 무성영화 시대에 세워져 마르크스 형제와 W.C.필즈가 사용하였다.[2] 맨해튼의 첼시 또한 종종 사용되었다.[2] 아카데미 상을 수상한 배우인 메리 픽퍼드가 이곳에서 초기의 일부 필름을 촬영했다.[2] 시카고, 플로리다, 텍사스, 캘리포니아와 쿠바에서도 영화가 제작되었다.[2]
2. 2. 발전
미국 영화는 에드워드 마이브리지가 캘리포니아주 팰로앨토에서 달리는 말을 연속 촬영한 사진(Sallie Gardner at a Gallop)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는 기록상 두 번째로 동작을 필름에 담아 재현한 사례였다. 마이브리지의 업적은 전국의 발명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토머스 에디슨은 키네토스코프를 발명하여 이러한 장치를 처음으로 제작한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미국 필름 산업 초기에는 뉴욕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퀸스의 카우프만 아스토리아 스튜디오는 무성 영화 시대에 세워져 마르크스 형제와 W.C.필즈가 사용했다. 맨해튼의 첼시 또한 자주 촬영 장소로 이용되었으며, 메리 픽퍼드는 이곳에서 초기 영화를 촬영했다. 시카고, 플로리다, 텍사스, 캘리포니아, 쿠바에서도 영화 제작이 이루어졌다.
2. 2. 1. 태동기와 대공황 시대
데이비드 W.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1915)은 미국 영화 발전의 기점으로 평가받는다. 무성 영화 시대에는 찰리 채플린을 비롯하여 세실 B. 데밀, 루이스 B. 메이어 등의 명감독들이 활약하였고, 존 배리모어의 《돈 환》(1926)을 통해 유성 영화 시대로 전환되었다. 앨 존슨의 《재즈 싱어》(1927)와 요제프 폰 시테른베르크의 《모로코》(1930) 등 발성영화 초기의 걸작이 잇따라 발표되면서 발성영화에 대한 찬반 논쟁은 발성영화 쪽으로 굳혀졌다.[1]새뮤얼 골드윈, 데이비드 O. 셀즈닉, 대릴 재넉, 세실 B. 데밀 등이 대제작사를 창설함으로써 할리우드가 세계 영화 산업의 중심지로 떠올랐으나, 1930년을 전후한 미국의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큰 시련을 겪었다. 이 무렵 찰리 채플린은 《모던 타임즈》(1936)를 발표하여 자본주의 산업 사회 체제 아래에서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반영하였다. 경제 대공황은 1933년경부터 차츰 회복되기 시작했다.[1]
이후 주목할 만한 작품이 나오지 않다가 헨리 코스타의 《오케스트라의 소녀》(1937)에 이르러 미국 영화는 낙천주의를 되찾게 되었는데, 이 영화는 색다른 뮤지컬로 이후 미국의 뮤지컬 영화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39년 빅터 플레밍 감독은 3950000USD를 들인 대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내놓아 77030000USD의 흥행 수입을 올렸다. 같은 해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영화화한 《애정(哀情)》을 내놓아 성공했다. 오슨 웰스 감독은 《시민 케인》(1941)을 발표하여 팬포커스(pan focus) 촬영 기법과 플래시백 기법 등 혁신적인 기법을 선보이며 미국 영화뿐만 아니라 세계 영화사에 획기적인 공헌을 남겼다고 평가받는다.[1]
2. 2. 2.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다수 제작되었다. 마빈 르로이 감독의 《애수》(1940)는 멜로드라마 장르를 굳혔다.[1] 마이클 커티스 감독의 《카사블랑카》(1942)는 전쟁에 휘말려든 인간 심리와 레지스탕스를 그려 좋은 평가를 받았다.[1] 샘 우드 감독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미국인의 정의감에 호소하였다.[1]마빈 리로이는 전쟁 영화가 주류를 이루는 와중에 《마음의 행로》를 제작하여 전쟁에 휩쓸린 인간의 비극을 행복한 결말로 마무리하였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우리 생애 최고의 해》(1945)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세 사람의 참전 용사가 전쟁이 끝난 뒤 각기 사회에 복귀하면서 겪게 되는 애환을 묘사한 작품으로, 어느 나라나 직면했던 심각한 사회 문제를 다루었다.[1]
전쟁과 관계없는 분야에서는 1940년 영국의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이 미국으로 건너와 《레베카》를 발표, 공포 심리를 파헤치는 서스펜스 드라마를 개발했고, 빌리 와일더 감독의 《잃어버린 주말》(1945)은 인간의 불안정한 내면세계를 특수 촬영과 음향 효과로 묘사하여 주목을 받았다.[1]
2. 2. 3. 사실주의
제2차 세계 대전 종결을 계기로, 할리우드는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영향을 받아 사실주의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는 전후 미국 국민들의 심리적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세미 다큐멘터리 영화는 과거 사건을 현장 로케이션을 통해 기록 영화처럼 재현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는데, 《벌거벗은 도시(1948)》가 대표적인 예이다. 배우들의 연기 또한 사실적으로 변했으며, 험프리 보가트, 리처드 위드마크와 같이 개성적인 배우들이 주목받았다.[2]전후에도 전쟁 영화는 꾸준히 제작되었으나, 단순한 영웅주의보다는 반전 메시지를 담거나 군대 내부를 폭로하는 작품들이 많아졌다. 《지상에서 영원으로(1957)》, 《돌격(1957)》 등이 이러한 경향을 대표한다. 한편, 사실주의에 대한 반발로 SF 영화가 등장했는데, 《월세계 정복(1950)》, 《지구 최후의 날(1951)》, 《우주 전쟁(1955)》 등을 제작한 조지 펄이 명성을 얻었다. 이들 SF 영화는 환상적인 공상을 통해 또 다른 현실을 창조해냈다.[2]
2. 2. 4. 텔레비전과 대형 영화의 등장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미국 영화 산업은 큰 위기를 맞았다. 1947년 15만 8천 대에 불과했던 텔레비전 수상기는 1950년 말 800만 대로 급증하며 영화계를 위협했다.[2]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입체 영화와 대형 영화 제작이 시도되었다. 입체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대형 영화는 순조롭게 발전했다.[2]1952년 9월, 세 대의 카메라와 영사기를 사용하는 시네라마 방식의 《이것이 시네라마다》가 뉴욕에서 공개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이후 한 대의 카메라와 영사기로 제작 가능한 시네마스코프 방식이 개발되어 1953년 9월 《성의(聖衣)》가 개봉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 영화계는 대형 영화 시대로 진입했으며, 비스타비전 등 다양한 방식이 개발되었다. 70mm 대형 필름을 사용하는 70mm 영화도 보급되었다.[2]
1959년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벤허》는 70mm 대형 영화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후 《그랑프리》, 《의사 지바고》, 《도라 도라 도라》, 《아라비아의 로렌스》 등 70mm 대형 영화가 계속해서 제작되었다.[1]
2. 2. 5. 해외와의 교류
1950년대 중반부터 서유럽 여러 나라에 대한 미국 영화 자본의 지배력이 강화되었고, 할리우드의 축소와 함께 해외에서 제작되는 작품이 많아졌다. 또한 유럽 작품의 세계 배급권을 장악하는 경우도 늘어났다.[2] 배우들의 국가 간 이동도 활발해졌다.이러한 교류의 결과로 이탈리아에서 서부극을 대량 생산하여 할리우드 서부극을 압도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새로운 영화 제작 방식은 스탠리 도넌 감독의 《언제나 타인(他人)》(1966)처럼 미국의 상업 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표현 수법을 시도하는 감독들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2]
2. 3. 감독계의 변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존 휴스턴, 로버트 와이즈, 프레드 진네만 등 기존 감독들과 엘리아 카잔, 조슈아 로건 등 영화에서 육성된 새로운 감독들이 등장했다.[2] 텔레비전의 발달과 함께 시드니 루멧, 존 프랭컨하이머 등 텔레비전 연출가 출신 감독들이 영화계에 진출하여 우수한 작품들을 만들어냈다.[2]3. 장르 영화
미국 영화는 오락 영화, 스릴러 영화, 서부극, 사회 비판 영화, 뮤지컬, SF 영화,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장르를 통해 발전해왔다.
3. 1. 오락 영화
미국 영화는 오락적 기능을 중시하며 다양한 오락 영화를 제작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세실 B. 데밀 감독의 《지상최대의 쇼》(1950)는 서커스 단원들의 삶의 애환을 그려내어 많은 관객에게 감동을 선사했다.[1] 존 포드 감독의 《아일랜드의 연풍》은 아일랜드인의 기질을 유쾌하게 묘사해 호평을 받았다.[1]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로마의 휴일》(1953)은 가상 국가의 공주와 미국인 신문기자 사이의 순수한 사랑을 그려내어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대표작으로 꼽힌다.[1] 빌리 와일더 감독의 《아파트의 열쇠를 빌려줍니다》(1960)는 평범한 샐러리맨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그려내 많은 이의 공감을 얻으며 호평을 받았다.[1]
3. 2. 스릴러 영화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은 《다이얼 M을 돌려라》(1954)에서 부인을 살해하려는 계획범죄를 다룬 뒤, 《사이코》(1960)에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지닌 한 청년의 이상심리를 그리는 심리분석적 경향을 보였다. 이후 《새》(1963)를 통해 문명비판 또는 신비주의적 일면을 부각시키기도 했다.[1] 히치콕은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64)와 《턴 커튼》(1966)에서 단순한 오락 취향의 스릴러를 지향했으나, 《토파즈》(1970)는 싱거운 첩보영화라는 비판을 받았다.[1] 테런스 영 감독의 《어두워질 때까지》(1967)는 장님 여인과 살인범의 이색적인 대결을 극적으로 묘사하여 스릴러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1]3. 3. 서부극
서부극은 미국 영화의 대표적인 장르로,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1914년 《대열차 강도》로 시작된 서부극은 미국의 독점적인 장르로 발전하면서 권선징악, 인간애, 시정(詩情)을 주로 다루었다.[1] 게리 쿠퍼, 존 웨인, 헨리 폰다, 제임스 스튜어트 등 유명 배우들이 서부극을 통해 등장했다.존 포드 감독은 서부극의 대명사로 불리며, 《역마차》(1939), 《황야의 결투》(1946) 등 다수의 명작을 남겼다.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하이 눈》(1952), 조지 스티븐스 감독의 《셰인》(1953)은 서부극의 고전으로 꼽힌다.[1]
1960년대 이후, 아서 펜 감독의 《작은 거인》(1970), 《솔저 블루》 등은 서부 개척사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서부극이다.[1] 이들 영화는 백인 중심의 인도주의를 강조하면서도 인디언 대량 학살을 당연시했던 기존 태도에 반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3. 4. 사회 비판 영화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1936)는 산업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했다.[1] 존 포드 감독의 《분노의 포도》(1940)는 남부 지식인의 정신세계를,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1941)는 광산촌 광원 생활의 비판을 그렸다.[1] 엘리아 카잔 감독의 《워터프론트》(1954)는 부두 노동자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했다.[1] 시드니 루멧 감독의 《12인의 성난 사람들》(1957)은 배심원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1]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의 《흑과 백》(1958), 노만 주이슨 감독의 《밤의 열기 속에서》(1967) 등은 인종 차별 문제를 다루었다.[1]3. 5. 뮤지컬
뮤지컬은 유성 영화 시대와 함께 발전한 장르이다.[2] 1937년 《오케스트라의 소녀》에서 시작된 미국의 뮤지컬은 1951년 조지 거슈윈의 음악을 채용한 빈센트 미넬리 감독의 《파리의 아메리카인》으로 활력을 얻었으며, 다시 미넬리 감독의 《지지》(1958)로 이어졌다.[1]대형 영화 시대로 들어선 뒤 뮤지컬은 더욱 성행하였다. 로버트 와이즈, 제롬 로빈스 공동감독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61)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조지 쿠커 감독의 《마이 페어 레이디》(1964)를 거쳐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사운드 오브 뮤직》(1965)은 아카데미 영화상을 석권하였으며, 이는 윌리엄 와일러의 《화니 걸》(1968)로 연결되었다.[3]
3. 6. SF 영화
SF 영화는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꾸준히 제작되어 온 장르이다. 미국의 SF 작품들은 텔레비전 시리즈나 영화로도 많이 만들어졌다. 1960년부터 3년 동안 휴고상을 수상한 텔레비전의 《제6지대》 시리즈를 비롯해, 휴고상 수상작으로는 《스타트랙》, 《스타워즈》, 《슈퍼맨》, 《에일리언 2》, 《인디아나 존스》, 《블레이드 러너》, 《백 투 더 퓨처》, 《인디아나 존스와 최후의 성전》, 《가위손 에드워드》 등이 있다.[2] 그 외에도 《반지의 제왕》, 《론머 맨》 같은 영화와, 스필버그의 《어메이징 스토리》, 《브이》 등 주요 텔레비전 드라마 작품이 있다. 거대한 거미, 개미, 고릴라같은 대괴수가 등장하는 작품도 많이 만들어졌는데, 우주 시대인 오늘날도 역시 왕성하게 제작되고 있다.[2]3. 7. 애니메이션
월트 디즈니는 1928년부터 1938년 사이에 미키 마우스, 도널드 덕, 구피, 플루토 같은 유명한 만화 주인공들을 만들었다. 디즈니사가 만든 애니메이션 영화들은 내용과 디자인, 예술적인 면에서도 애니메이션 산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소리를 처음으로 사용한 애니메이션 영화인 《증기선 윌리》(1928)는 《미키 마우스 시리즈》에서 탄생한 것이다. 1929년부터 1939년까지 디즈니사는 《실리 심포니》 연속물을 만들었고, 1937년에 세계 최초의 장편 만화 영화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만들었으며, 그 밖에도 《피노키오》(1940), 《판타지아》(1940), 《밤비》(1942)를 제작했다. 디즈니를 비롯한 몇몇 영화사들이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애니메이션 산업을 좌우했다.[2]메트로 골드윈 메이어사에서는 윌리엄 해나와 조지프 바버라가 고양이와 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톰과 제리》를 만들었으며, 유니버설사의 월터 랜츠는 토끼 오스왈드, 딱따구리 우디를 주인공으로 한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가 다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966년 월트 디즈니가 사망한 후로 쇠퇴했던 디즈니 영화사는 해마다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한 편씩을 제작해 전 세계에 상영하고 있다.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도 1986년에 첫 애니메이션 영화인 《아메리칸 테일》을 개봉했으며 디즈니 영화사와 합작으로 극영화와 애니메이션을 합한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1988)를 제작하기도 했다.[2]
오늘날 애니메이션은 전 세계에서 제작되고 있으며 대한민국과 일본에서도 많은 사람이 이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컴퓨터 애니메이션과 같은 새로운 기술들이 극영화와 애니메이션 영화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이러한 기술의 발달로 이미지를 창출하는 새로운 분야가 생겨나고 있다.[2]
참조
[1]
간행물
예술·스포츠·취미/영화/영화의 감상/미국영화의 감상/미국영화의 감상[개설]
글로벌 세계 대백과
[2]
간행물
예술·스포츠·취미/영화/영화의 감상/미국영화의 감상/현대 미국영화의 전망
글로벌 세계 대백과
[3]
간행물
예술·스포츠·취미/영화/영화의 감상/미국영화의 감상
글로벌 세계 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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